
아회소식
아회찬양선교재단의 다양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 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눅 1:1~7)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단순하게 ‘과일나무다’ 이렇게 단정을 짓지만, 한 그루의 과일나무가 있기까지의 여러 가지 일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사실을 다 판가름하지 못한다. 
유명한 석학들이 나름대로 연구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전부 알기는 어렵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있기에 앞서서 사과의 씨앗이 어려운 겨울나기를 통해 그 싹을 틔우게 된다. 
사람은 그냥 ‘아, 씨앗이 겨울나기를 통해 싹을 틔우는구나!’ 이렇게만 알고 있지, 죽음 같은 겨울나기를 통해서 새 생명이 소생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음의 세계에 계시다가 사흘 만에 올라가심을 성경을 통해 이론으로는 안다. 
하지만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같이 겨울나기를 통해 자기에게 새 생명이 소생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해 새 생명을 예비하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현재 자기 눈에 보이는 모든 만물의 근본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눈앞에 있는 모든 사물과 모든 일 자체가 부정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 사실을 역으로 바꾸면 그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떠한 수모나 어려움도 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 된 근본을 바로 안다면 이러한 사물의 흐름을 자기의 생활에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동물들의 털갈이를 도와주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집에서 키우는 가축이라도 그 주인이 털갈이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서 털갈이를 통해서 겨울을 나게 만들고 털갈이를 통해서 여름을 나게 만드시는 것이다. 
사람은 단지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먹이를 제공할 뿐이다. 
설령 사람이 먹이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먹이심은 당연한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사랑을 깨달을 기회를 얻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조건을 허락하셨지만, 사람들은 모든 사실이 자기의 생각 안에서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산 사람과 또 하나는 죽은 사람이다. 
산 사람은 긍정적인 사고에서 시작하지만, 죽은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사고에서 시작한다. 
이 사실을 신앙적으로 풀이하면 산 사람은 소망에다 자기의 삶을 두고 있지만, 세상적인 사람은 자기의 희망과 포부에 자기의 삶을 두고 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우선 내 기분에 맞지 않고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기에게 주어진 한순간의 겨울나기를 통해 자기의 삶이 새로이 소생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옛 어른들이 하는 말이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라고 한다. 
젊을 때 겨울나기를 보람되게 보내라. 하게 되면 먼 훗날 네게 보람된 세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모든 만물은 단 한 부분도 이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정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 만물이라면 이 사실에 순응해야 한다. 
어려운 조건, 앞이 캄캄한 조건이 생겼을 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향해야 할 곳을 바로 바라보는 것이 가장 지혜롭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기서 벗어나기만을 바라지, 자기의 새 생활에 대해서는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어떤 회사에서는 새로이 소생하기 위해 매년 극기 훈련을 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개개인의 생활에서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서 거기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고 ‘겨울나기가 내게 소중한 일이기에 어떻게 하면 보람되게 보낼까?’에 주안점을 맞추어야 한다. 
사람은 자기가 극기 훈련을, 자기 자신이 겨울나기를 잘 치른 줄 알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붙드심이 없으면 극기 훈련을 치르지 못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우연히 룻기서 말씀을 보게 하신 적이 있다. 
룻기에서 나오미가 겪었던 사실을 보면서 ‘아무리 내 상황이 어렵다고 해도 나오미만큼은 어렵지 않겠다. 남편을 잃고 자식을 다 잃고 아무 상관 없는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만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감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어진 이 사실에서 벗어나게 만드신다.’ 그 사실을 굳게 믿고 끈을 놓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재생할 기회를 허락하셨다. 
 
우리에게도 매 순간 겨울나기가 닥친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일주일에도 몇 번씩, 한 달에도 몇 번씩 겨울나기가 닥친다.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에 몇 번씩 겨울나기가 닥친다.
이러한 겨울나기를 통해 우리 자신이 새로이 소생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는데 주안점을 두지 못하고 현재의 내 어려움에만 주안점을 둔다면 사람으로서는 가치가 없다. 
 
사람이 살면서 얻은 지혜로써 식물의 싹을 틔울 때 냉장고에 넣어 일부러 겨울나기를 한 후 끄집어내어 싹을 틔우게 한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 처지에 맞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할 일은 어떠한 상황과 조건이 주어져도 감사로서 화답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자 할 일이다. 
 
꼭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다. 
믿음의 사람의 얼굴에는 감사와 기쁨이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 
한순간의 우수는 깃들 수 있지만 그 우수가 오래가게 만드는 것은 죄가 된다.
자식 된 도리로 얼굴에 우수가 있게 하는 것은 부모에게 죄요, 나를 내신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평생 사는 동안 한순간의 우수는 깃들 수 있어도 그 우수가 내 생활에 형상화되게 놔두는 것은 죄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사실을 마음에 새겨서 일평생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는 산증인이 되자. 
 
(눅1:1~7) 사람은 누구나 이성에 관한 바램이 있고, 이성에 관한 바램을 이룬 사람이라면 그 이성을 통해 자기의 후대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도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똑같은 어려움이 있었다. 
비록 이성의 조건은 주어졌어도 그들이 바라는 후대가 없었다. 
자기의 후대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당연지사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한순간에 부정적인 사실로 단정을 지어버리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을 처리할 때는 그러한 사실이 아랑곳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우리가 자기의 얄팍한 지혜로 일을 정리해서 모든 일을 감사와 기쁨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부정적인 사실로, 낙담으로 화답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그를 위해 죽음에 임하게 하시고, 그 사실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이신 사실이 오늘도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오늘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늘도 또한 죽음에 임하시는 이 사실이 계속해서 반복됨을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통해 알게 하신다. 
 
육적인 사실로는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마무리 지었지만, 영적인 사실로는 그 사람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때마다 이러한 사실이 벌어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실이 나로 인해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이 생기지 않게, 나 자신을 통해서 예수님께 계속해서 이런 사실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할 일이다. 
 
바울 사도는 단 한 번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의 사실을 통해서 일평생 자기의 삶을 가누었다.
이처럼 단 한 번의 사실로 일평생을 간다는 것은 힘들겠지만, 몇 번의 사실로라도 우리 자신을 가눌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생활에서 벌어지지 않게 이제는 조금 자중하고 가눌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게 아름답게 사랑을 이루는 우리가 되자. 
 
자신의 안일에만, 자신의 마음 편함만, 자기 생각에만 치우치지 말고 내 형제에게도 이 같은 사실이 주어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사랑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우리가 되자. 
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우리의 생활에 감사로서 화답하실 것이다. 
 
귀한 성탄절을 통해서 잃어버렸던 모든 일, 어두웠던 모든 일을 깨끗이 청소하고 말끔히 털어버리고 새 생활로 임할 수 있는 귀한 계기를 얻기를 바란다.
 
(1999.12.14. 주일 / 김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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