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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43.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 등록일 : 2025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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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마6:26~34)

 

 

우리가 옷을 입고 생활해 나갈 때 어떤 사람은 정장 차림을 하고 어떤 사람은 간편복을 입는다. 

정장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가정을 갖는다는 말과 같다. 

정장을 할 때는 와이셔츠나 위, 아래의 옷, 넥타이, 신발, 머리 스타일까지 전반적으로 다 하나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차림을 잘했다고 말한다. 

가정을 가진 경우는 아내의 일에 문제가 생겨도, 남편의 일에 문제가 생겨도 밸런스가 맞지 않아서 차림을 잘 못했다고 한다. 

아내와 남편의 일이 바르게 되어도 자식의 일이 바르지 않으면 또 차림을 잘 못했다고 한다. 

 

가정이 단란하게 갖추어져도 규범 안에서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지 못하면 가정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수많은 가정 가운데 이러한 모습을 갖춘 가정이 몇이나 될까? 

우리가 허물을 가린 가운데 지나가기에 그냥 넘어갈 뿐이지, 사실 그렇게 아름답게 드러낼 집안이 별로 없다.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 아버지다”, 예수님께서 “내가 네 남편이다”라고 하시며 우리의 모습을 가꾸어 가신다.

이같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예수님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아름다운 결실을 보게 된다. 

우리를 통해 아름다운 소산물이 주어지게 될 때 “저 사람은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의 신앙생활은 본받을 만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그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지만, 이 사실을 우리의 생활에 도입시켰을 때 아무 상관 없이 도입시켜 버린다. 

가정을 이루어 아내를 얻고 남편을 얻고 자식을 얻어도 그 가운데서 아름다움이 주어져도 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여기지 못하고, 감사가 주어져도 감사로 여기지 못하고, 끝내는 그 아름다움을 자기 손으로 소멸시켜 버린다. 

가정을 통해서 주어지는 그 소산물을 받아야 할 곳은 자기가 아니라 위로 가야 할 사실들을 자기가 받아버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욥에게는 10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사탄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셨기 때문이며,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시면 하나님을 대적하여 욕할 것이다’(욥1:9~11)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고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욥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그 소산물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끝내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사탄이 떠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허락하셨다. 

가정을 가진 사람 중에 그에게 주어지는 소산물을 진정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땅 위에서 평화를 바라고 행복을 바라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땅 위에서 평화를 바라고 행복을 바란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산물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사실은 보지 않고 그 소산물을 자기에게 돌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 소산물을 자기에게 돌리려면 그 사람이 숨을 쉬는 것부터 모든 생활을 자기가 주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숨을 쉬는 것부터 주어지는 모든 범사가 우리의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조건을 주신 그분께 돌아가야 할 사실을 우리가 취하는 바람에 땅 위에는 평화도 없고 행복도 없는 것이다. 

 

가정을 가진 사람을 정장 차림에 비유했다면, 간편복을 입은 사람도 있다. 

간편복을 입은 사람은 정장 차림의 길에는 끼기가 조금 멋쩍다. 

하지만 자기의 모든 생활상에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정장 차림의 사람이 자기의 삶을 시도하려면 정장을 벗지 않고는 자기의 삶을 이어 나갈 수가 없다. 

간편복을 입은 사람은 어느 때든지 자기의 삶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아서 내게 주어진 소산물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곳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각오와 지혜가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욥이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과 구역을 맡겨서 ‘동양의 거부’라는 자리에 올리셨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조상’이라는 자리에 올리시고 수많은 후손을 맡기셨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신앙의 선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실을 맡기시고 그의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시고 기뻐하셨다.

 

(마6:26~끝) 자기에게 주어진 감사의 조건, 기쁨의 조건을 최대한 소멸하지 않고 감사로 되돌리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범사 가운데서 내게 주어지는 아름다움, 내게 주어지는 감사, 내게 주어지는 기쁨을 최대한 누릴 수 있게 신경을 곤두세워서라도 감사할 수 있게, 기쁨을 찾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신앙인들은 한겨울에 냉기가 닥치는 데도 여름옷을 입고,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감사의 조건을 빼앗아 갈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빨리 옷을 덧입어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하는데, 감사를 앗아갈 조건이 생기는데도 그대로 방심해서 감사의 조건, 기쁨의 조건을 빼앗긴 후에 그만 열 받아 뒤로 넘어진다.

 

우리에게 감사할 조건이 없을 때는 최대한 감사의 조건이 생기게, 기쁨의 조건이 없을 때는 조금이라도 기쁨의 조건이 씨알을 찾을 수 있게, 한겨울에 여름옷을 입은 사람처럼 예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겨울이 되면 두꺼운 옷을 입듯이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답게 어떠한 조건이 주어져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삶을 살아드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맡기시고, 세상을 통해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허락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발을 붙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복을 누릴 수 있게, 누구나 똑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허락하셨다. 

허락하신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본인 자신이 상실하는 바람에 받지 못할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똑같은 은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을 허락하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자. 

 

(2000.09.24.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