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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 등록일 : 2025년 11월 12일
  • 조회수 : 174

★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눅6:1~5)



 

세상에는 해야 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이 있다. 

또 먼저 해야 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될 일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서야 될 위치, 자기가 해야 할 일, 먼저 해야 될 일, 나중에 해야 될 일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집안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누구 할 것 없이 먼저 본 사람이 그것을 정리하고 치워야지 “이거 치울까요? 말까요?”하고 물어보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회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도 “이 일을 할까요? 말까요?”를 묻는다면 그 사람은 벌써 자격이 없다. 

가정에서 부부간에도 이런 일 때문에 다툴 때가 많다. 

 

항상 객관적으로 지켜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주관적으로 보는 눈이 흐려진다. 

끝내는 자기에게 주어진 구역을 자기 손으로 지키지 못하고 쫓겨난다.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가꾸지 못하는 바람에 쫓겨나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객관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계속 깨닫게 하시지만 그래도 깨닫지 못할 때는 끝내는 쫓김을 당한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스스로가 자기 일을 돌아보고, 또 먼저 해야 될 일은 먼저 하고 뒤에 해야 될 일은 뒤에 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직장에서도 항상 객관적으로 하게 되면 그 일을 맡은 주인이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기의 생활을 통해서 언젠가는 그 일이 형상화되고, 스스로가 나오지 않아도 끝내는 내쫓김을 당한다. 

베드로가 수제자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은 똑똑해서가 아니다. 제일 강직했고 제일 멍청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의 할 일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주관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기에 수제자의 대열에 올랐다. 

열두 제자 중에 베드로만큼 그 일들을 주관적으로 본 사람이 없다. 

요한과 야고보만큼 똑똑하지도 못했고 고집 세고 남은 것은 의협심 밖에 없었다. 

모든 일을 주관적으로 본 것 외에는 베드로란 사람이 똑똑한 점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를 통해 우둔한 사람을 들어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일생을 허락하시면서 그 일생 가운데서 여러 가지 범사를 일으키신다. 

어떤 때는 사업의 실패도 가져오고, 어떤 때는 건강을 앗아가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심적 갈등도 느끼게 하신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일을 벌이실 때마다 그 일을 달갑게 여긴다고 했다. “지혜로운 자는 책망을 달갑게 여긴다” 

그러한 섭리를 통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범사를 불평불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일을 감사로 받아들여, 그 일이 자기에게서 안착이 되게 한다. 

병마를 물리는 것이 아니라, 사업에 실패한 조건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악화된 일을 순화시켜서 그 일이 자기에게 능력이 되게 한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그 일이 자기에게 닥치지 않게 사전에 준비한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주관적으로 볼 때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생긴다. 

부모나 교사는 먼저 자기가 가진 능력을 통해 그 자녀와 제자를 키워나간다. 

올바른 부모라면 자기가 겪은 사실을 그 자식에게 하나씩 전수시켜 나간다. 

만약 노래를 가르치는 성악가라면 제자의 잘못된 소리를 자기 소리로 먼저 들려준다. 

비록 자기 목에는 안 좋을지라도 자기 몸에 그 제자의 잘못된 소리를 담아 들려줌으로써 자기의 소리를 자각하게 만든다. 

다음에는 그 소리가 바뀌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자기가 해야 될 일을 하나씩 알게 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교사라면 그 제자에게 “네 소리가 틀렸다. 고쳐야 한다. 혀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그 일을 객관적으로 처리한다. 

그 교사 밑에서 배운 제자는 한평생 그 고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혜로운 교사는 제자가 혀에 힘이 들어간 이유를 먼저 알고 제자가 혀에 힘을 뺄 수 있게 먼저 조건을 제시한다.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교사는 제자의 단점을 지적해서 끝내는 그 제자가 자기의 단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 끝내는 함께 자멸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조건을 불평불만하고 섭섭해하기보다는 먼저 그 조건이 내게 닥쳐오기까지의 과정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올바른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려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까지 하시며 속죄물로 제시하셨다.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죄사함 받는 것, 자기의 구원 받는 것’에 치우친다면 속죄물로 내놓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을 속죄물로 내어주신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랑을 기억할 때 은혜로써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은혜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 일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 가운데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죄사함을 받아야겠다” 여기에 치우치지, 사랑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조건을 제시하신 그 사랑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기에 어려움과 괴로움을 자초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범사를 피해 가지 못한다. 

어떤 일을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그 일을 벗어나기에 앞서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감사로 받아들이고, 그 일이 자기에게 주어진 그 과정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객관적으로 보지 말고 주관적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뜻이 뭔지, 내 가정에 바라시는 뜻이 뭔지 세밀하게 돌아보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이러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더하신다. 

스스로가 지혜와 능력을 구사하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뜻대로 그 일을 구사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주관적으로 보고 사랑과 감사로 지켜 나갈 때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통해서 지혜와 능력을 더하신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피해 가려고 하지 마라. 

그 일이 필요하기에 하나님께서 이끌어 오신 것이다. 

우리 주어진 일을 불평불만으로 받아들이지 마라. 자신을 깨닫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되게 하나님께서 그 일을 끌고 오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주어진 일을 지혜롭게 처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길 “너도 섭섭하니? 나도 섭섭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사랑을 객관적으로 보고, 끝내는 그 사랑을 저버리고 왕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그들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셨다. 

그나마 그 조건을 통해서라도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이 될까 싶어서 그들에게 왕을 허락했지만, 끝내는 그들이 그 왕을 통해서 자멸하는 길로 가고 말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그마한 일도 가볍게 넘기지 마라.

‘내게 주어진 일들이 왜 닥쳤을까?’ 그 일을 주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고 주관적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지혜롭다. 

 

우리의 일이기에 앞서 개개인의 일이다. 누가 처리해 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게 주어진 일이기에 내가 지혜롭게 처리해버리면 가볍게 끝날 일을, 미루고 미뤄서 끝내 잘못된 길로 만들어 간다면 참 지혜롭지 못하다. 

 

자라면 자란 사람답게 그 일이 개개인의 일인 것을 알거든 개개인이 처리해야 한다. 

스스로가 주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지켜가지 못하면 끝내는 쫓겨난다. 

자기의 일에 치우쳐서 개인의 일만 주관적으로 보고 다른 일은 전부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 끝내는 그 일이 모든 일을 자멸시키게 만든다. 

 

지혜롭지 못한 부모는 자식을 키워나갈 때 주위 모든 일을 묵살해 버린다. 

친구에게 맞았다고 하면 친구를 묵살해 버린다. 

지혜로운 부모는 그 일도 어디까지나 그 아이에게 주어진 테두리이기에 오히려 아이가 그 일을 통해서 사랑을 이루고 자랄 수 있는 조건이 되게, 두 아이가 친분을 이루어가게 만든다. 

지혜롭지 못한 부모는 오히려 그 자리를 끊어버린다. 

한순간은 좋을지 몰라도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자기의 삶을 펼쳐가는 데는, 능력을 키워가는 데는 바람직하지 못한 조건이 된다. 

어렵고 괴로운 일도 감사로 받아들이고, 범사를 감사로 처리해 나갈 때는 그 어떠한 일도 우리 앞을 가로막지 못한다. 

 

(눅6:1~5) 우리가 서야 할 위치관을 분명히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모든 만물 중 사람만이 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한다. 

사자들도 이런 일에서는 사람보다 똑똑하다. 

신기하게도 먹이를 잡는 것은 숫사자가 하지 않는다. 

암사자들이 그 일을 다 처리하고 마무리 짓는다. 

다시 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영역을 스스로가 해결해 나가도록 만든다. 

숫사자가 하는 일은 다른 영역의 사자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항상 울타리를 지운다. 

암사자들과 새끼들은 숫사자가 지켜준 그 영역 안에서 자기의 삶을 꾸려간다.

 

한순간 모면하는 생활을 하지 말고 내구적으로 자신을 키워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보고 피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그 일을 지켜 나갈 때 하나님께서 구역을 허락하시고 구역을 지켜갈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더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시고 그들이 그 일을 지켜 나가는 방법을 제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객관적으로 보지 말고 주관적으로 보라고 그렇게 부탁하시지만, 끝내 그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일을 객관적으로 지켜보고 자기들의 방식대로 처리하는 바람에 망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들이 주관적으로 그 일을 보고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께서, 이같이 능력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땅을 우리에게 맡기셨기에 우리가 감사로 받아들이자” 이렇게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이 되었더라면 40년의 광야 생활 없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민13:31)고 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객관적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끝내 그 일이 자기들에게 주어지지 않고, 다 죽고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 그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스스로가 개척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을 스스로가 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더하신다. 

신앙생활은 절대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 방법으로 하면 사탄에게 속는다.  

끝내는 우리의 삶이 사탄에게 끌려가게 된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 사탄이 이 일을 넘보지 못한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재형상화 되기를 바란다. 

 

(2000.08.13.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