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회소식
아회찬양선교재단의 다양한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1:29)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람됨을 상실해 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을 되찾게 해주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은혜를 입히심에 우리가 할 일은 감사로 화답할 일인데 “내가 뭘 했어요. 내가 얼마를 갚았지요.”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걸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감사로 화답하기를 바라신다. 
감사로 화답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심을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내가 수고하고 내가 뭘 했기에 나를 이렇게 해주셔야 한다.” 그럴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았을 것이다. 
 
일생을 사는 동안 조건들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똑같이 주어지는데 어떤 사람은 감사하는데 어떤 사람은 감사하지 못할까? 
신기하게도 곤경에 빠진 사람, 은혜를 옳게 입지 못한 사람은 감사하는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감사치 못하더라. 
신기하게도 빚을 많이 진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는데 빚을 적게 진 사람은 감사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일이 정비되었지만, 자기들의 욕구대로 그 일이 정비되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와 자기 후손들에게 그 핏값을 돌리라(마27:25)고 말하며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다. 
우리의 식견으로는 은혜를 입으면 입은 만큼 더 감사해야 하는데 은혜를 입은 사람이 그 은혜에 감사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뭘 바라셨을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일에 감사하고, 우리의 생활에서 기쁨을 되찾길 바라셨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서 은혜를 은혜로 간직할 때 이 모든 사실을 기쁘게 받으시겠다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책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우리의 삶에서 좌절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감사로 화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도록 일한다. 
그러면서 자식들에게 “내가 이같이 수고했으니, 너도 뼈 빠지게 수고해라” 하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자식이 부모의 일을 그나마 기억하면 좋고, 기억하지 않더라도 그냥 자신의 생활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화답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바램이다. 
진정한 부모라면 “내가 이같이 했으니, 너도 이같이 해라’ 이런 부모는 세상에 없다. 
 
일생을 사는 동안 수많은 일을 겪고 대하게 된다. 사람이 할 일은 감사하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할 일이다.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불뱀에게 물렸을 때 모세가 구리로 만든 뱀을 높이 들었다. 
이 구리뱀을 든 것은 그들의 마음에 그 은혜를 기억하고 그 사랑에 감사하게 하기 위해서 구리뱀을 높이 든 것이다. 
구리뱀 앞에 가서 절을 하거나 그 어떠한 행동을 하라고 지시하지도 않았다. 
그냥 구리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모든 병이 다 낫게 만들었다. 
하지만 끝내 그 사실을 감사로 돌리지 못해서 자기의 생을 끝낸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은혜를 입고도 은혜로 알지 못하고 은혜에 감사하지 못한 것이다. 
 
일생을 살면서 어려움이 닥쳤다고 두려워하지 마라.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오히려 “나에게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나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 이 어려움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여, 나를 도우소서” 하고 입술을 뗄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그 일을 기억하기보다도 그 일을 자기 손으로 정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일생을 살아갈 때 순조롭고 평탄한 것만 아름답고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경과 괴로움, 답답함이 내게 더 감사와 기쁨을 더한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기쁨이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랑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히려 그 일을 더 감사한다. 
박해와 환난을 통해서 삶이 자라감을 기억해야 한다. 
 
은혜를 입고 싶거든 부잣집 앞에 가서는 그 부자보다 좀 못한 것을 보여주고, 권력자 앞에 가서는 당신의 그 권력보다는 내가 권력이 없는 비루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때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은혜를 입힌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월권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잘난 척하지 말자. 그래야 하나님께 은혜를 입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역경과 괴로움, 답답함이 닥칠 때 “하나님께서 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께 붙이시기 위해 조건을 허락하심에, 일깨우심에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자. 
 
일생을 사는 동안 ‘어려움이 닥쳤다. 병에 걸렸다’ 하거든 ‘하나님께서 나를 이만큼 사랑하시는구나’ 이렇게 보면 가장 정확하다. 
‘나를 이만큼 사랑하셔서 이만큼 아프게 만드셨구나’ 이러한 지혜가 우리의 생활에서 되살아나기를 바란다. 
 
사람의 고통이나 괴로움, 답답함은 우리를 괴롭게 하거나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그 일을 통해서 알게 하심이다. 
그러기에 두려워하지 말자.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데, 내가 환란을 당했는데” 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일깨우심에, 사랑하심을 보이심에 감사합니다” 화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자. 
하게 될 때 그 어떠한 어려움과 괴로움도 우리 앞을 가로막지 못한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어려움과 괴로움, 답답함을 피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긴다. 
그 일을 대처하고자, 대적하고자 나갈 때는 그 일이 우리 앞을 가로막지 못한다. 
우리에게 어려움과 괴로움이 닥쳤다고 할 때 오히려 그 일을 통해 감사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자 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또 우리에게 좋은 일이 주어질 때 그 좋은 일이 나에게만 머물 것이 아니라 그 좋은 일을 바로 누리지 못하는 내 형제에게도 그 좋은 일이 주어지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되어서 어려울 때 위로받고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자. 
이 같은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고자 지혜와 능력과 조건을 허락하시고, 우리의 생활 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만방에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다.
 
(요1:29) 요한이 예수님을 뵈었을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했다. 
그에게 그 사실을 일러준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재물로 드리려고 예비시킨 사람이다’ 아무도 요한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는 단번에 자기에게 나아온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지혜를 받았다.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어도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될 것을 밝히게 되고, 알게 하셨다. 
이 사실은 지난날뿐 아니라 오늘날도 똑같이 역사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심을 알게 한다. 
일생을 사는 동안 이러한 사실들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음을 기억하자.
 
그러기에 일생을 사는 동안 이러한 사실이 항상 우리 주위를 맴돌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심을 기억해서 아무리 어렵고 괴롭고 답답한 일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관여하시기 위해 일으키신 일이기에 감사로 화답하는 사람이 되자. 
하게 될 때 어렵고 답답하고 괴로운 일들이 감사로 화답 받게 된다.
 
(2000.08.06.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