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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8.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 등록일 : 2025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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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4~25)

 

 

신앙생활의 근본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내신 그분께 있음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우리를 내신 그분을 우리가 안다면 그분이 내신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를 내신 분과 우리 형제를 내신 분이 동일한 분이다. 

우리가 우리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를 내신 그분을 믿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의 생활권에서, 가정이나 사회에서 심지어 부부간, 부자간에도 사랑한다는 것이 참 힘들고 어렵다. 

그러면 이 어려운 사랑을 우리에게 하라는 말인가? 아니다. 어렵지 않다. 

사랑의 근본이 내 형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근본이 내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아내와 내 남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근본이 우리를 내신 그분께 있음을 기억하게 될 때 모든 일이 아름답게 이어진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할 때 내가 바라는 상대에게 사랑을 걸기 때문에 어느 시기가 지나면 그 사랑이 모호해진다.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내 기분에 맞지 않을 때, 갈 길을 잃어버릴 때, 세상을 따라갈 때, 내 길에서 벗어날 때 그 사랑이 모호해진다. 

사랑의 근본이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바로 안다면 이런 일에 걸리지 않는다. 

 

문제는 사랑의 근본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알고 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의 근본을 자기에게 두기를 바란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다. 

사랑의 근본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내신 분에게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로 알게 하시고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사랑의 근본을 자기에게 두기를 바라다가 살인하고 방화하고 도둑질하고 엉뚱한 일을 벌이게 된다. 

사랑의 근본을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시기 질투가 웬 말이고, 오해가 웬 말일까? 

문제는 사랑의 근본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의 근본이 자기에게 있는 줄 알고 아우성치다가 끝내는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 아담이 감사치 못하는 바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감사케 하시고자 하와를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주지 않아도 되는데,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8:5) 

하도 바라는 바람에 왕을 준 것이지 왕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 사실은 옷도 필요 없을 수 있다. 

우리가 알 것을 다 알아버리고 나니 결국 몸을 가리지 않고는 생활하지 못하기에 옷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생활하기 위해서 입는 이 옷에 얽매인다면 이것도 하나의 걸림돌이다. 

이성에 얽매이는 것도, 물질에 얽매이는 것도 똑같다. 

 

부모 또한 똑같다. “내 자식인데”부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긴다. 

근본을 하나님께 두어야 하는데 “내 자식”이라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바람에, 근본을 나에게 두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 바람에 마음이 강팍해지고 섭섭해진다.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신 것이다. 

 

우리가 근본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어떤 사실에 두게 될 때 우상이 된다. 

이성에, 물질에, 내 자식에게, 내 남편과 내 아내에게 두게 될 때 우상이라 한다. 

근본이 우리를 내신 그분께 있음을 기억할 때 모든 일이 감사와 기쁨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가 바로 알고 신앙생활을 할 때는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허락하신 세상이기에 내 삶만 바로 정립하면 모든 것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 삶을 바로 정립하지 못하는 바람에 두려운 것이다. 

자기의 생활은 정립하지 않고 자기가 바라는 그 사실을 끌어들이다 보니 도둑이 되고 강도가 되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사실이 있다면 내 생활을 바꾸어서 그 사실이 나를 따라오게 해야지, 그 사실을 내게 억지로 갖다 놓으니 도둑이 되고 강도가 된다.

 

모든 생활의 근본을 바로 알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허락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그분을 바로 알고 나아갈 때 우리의 모든 삶이 지혜로워지고 감사로 나아가게 된다. 

사랑의 근본을 바로 알고 나아간다면 어떠한 사실이 주어져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마16:24~25) 우리의 근본을 우리 개개인이 바라는 일에 두지 말고 우리를 내신 그분께 두라는 말이다. 

우리의 모든 근본을 그분께 두게 되면 모든 일이 그냥 넘어간다. 

지혜의 말씀을 대입시키면 그냥 간단히 풀려진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을 버리고 따라가려 하니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 

우리의 모든 근본이 우리를 내신 그분께 있음을 알고 나아갈 때는 이런 사실은 그냥 당연한 일로 넘어간다. 

 

우리의 모든 생활상 하나하나, 내 자식이나 내 남편이나 아내나 내 부모까지도 우리의 생활을 잇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가는 하나의 끈이 되기에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다. 

하게 될 때 모든 범사를 인정하게 되고, 모든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우리의 삶이 진행된다. 

 

모든 사실은, 만물 하나도 끝내는 근본으로 다시 돌아간다. 

언젠가 우리의 삶도 다시 찾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질 것을 염원하게 하셨다.

 

진정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신앙생활을 하는 자체가 나 자신을 위해서 하기보다 나의 일이 한 알의 씨앗이 되어서 내 삶을 통해 내 주위가 감사하도록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근본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내 주위가 감사하게 되고 내가 내 삶을 접음으로써, 내 욕구를 접음으로써 내 형제가 감사케 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자. 

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더하시고 능력을 더하셔서 주위 조건을 감사와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모체가 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결국은 우리의 삶을 보상받는 길이 된다.

 

(2000.04.16. 주일 / 김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