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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6.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 등록일 : 2025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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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2:18~19)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뭘까?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이 하늘이다. 

겨울에는 잿빛이었다가 잿빛 하늘이 걷어지면서 하늘에서 봄기운이 돈다. 

하늘을 보고 ‘아, 봄이구나!’ 느낀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나무에서 물이 올라오고 좀 더 있으면 싹이 올라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사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가신다. 믿음의 사람의 생활도 똑같다. 

우리의 생활상을 통해서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이런 사실이 풍겨지게 하는 것이 옳다. 

교회를 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늘 땅 차이이다.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의 품격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상을 통해서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구나.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하고 우리의 사실을 눈여겨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할 일이다.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의 품격이나 풍기는 기운이 다르다. 

엄마가 아침밥을 준비할 때 냄새가 나면 그 냄새를 통해서 ‘아, 오늘 아침은 된장국이네. 냉이국이네’ 안다. 

음식을 보여준 것도 아닌데 벌써 냄새를 통해서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봄기운을 불러오시면 하늘의 색깔을 보고 ‘아, 봄이 왔구나’ 느끼는 것처럼, 믿는 사람의 생활상과 품격을 통해서 “아, 저 사람은 믿는 사람이구나” 이런 말이 나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된다. 나를 두려워하기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믿음의 사람의 진정한 자세이다. 

 

만약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 행동을 개떡같이 하면 “어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그다음에 붙는 말이 ‘예수쟁이’이다. 좀 더 기분이 나쁘면 “네가 천당 가면 나는 만당 가겠다”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이런 말들이 번지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된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우리의 생활을 잘 가눌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정 믿는 사람은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진정 그 사실을 내가 감사하느냐, 감사하지 못하느냐가 문제다.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아니다. 

진정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내가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하면 찬송을 하든, 기도를 하든, 무엇을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시51:16)

 

우리가 믿는 사람이라면 먼저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이 가장 지혜롭다. 

감사치 못하면 근본부터 신앙의 사상이 빗나가는 것이다. 

생활상에서 어떠한 조건이든 감사치 못하면 벌써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속이고, 상대방이 뭘 하고’ 그건 하나의 조건이다. 

그 사실이 내게 부닥치게 했다는 것 자체가 벌써 속은 것이다. 

 

노아 홍수 때 방주를 만들었을 때 물이 들어오게 했다면 벌써 그 방주는 가라앉았을 것이다.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역청을 발랐기에 가라앉지 않은 것이다. 

감사치 못할 조건이 생겼다고 해서 “물이 들어와서 구멍이 뚫렸네” 그러면 벌써 속은 것이다. 

잘못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지,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감사치 못한 일을 조건에다 책임을 지운다. 

아담도 잘못을 저지르고 난 뒤에 그 잘못의 책임을 조건에다 지웠다.

 “당신이 나에게 준 여자가 줘서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감사치 못한 자체가 벌써 틀린 것이다. 

‘내가 뭐 해서, 누가 뭐해서, 주위에서 뭐해서’ 어떤 조건이든 무슨 상황이든 감사치 못하면 내가 나쁜 것이지, 그가 나쁜 것이 아니다. 

사탄이 그를 이용하는 바람에 그런 것인데, 그것을 보고 속았다면 나도 똑같은 사람이다. 

 

아담이 이런 사실을 바로 알았다면, 하와에게 “아이고, 당신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벌써 먹었군요. 이를 어쩌면 좋지. 여기 숨어 있으시오. 내가 가서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용서를 구해 보겠소” 이런 말이 나와야 될 텐데. 

하와가 준다고 덥석 받아먹고서 하는 말이 “당신이 나에게 준 여자가 먹게 해서 먹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진정 믿는 사람이라면 조건에 휘말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혼한 사람은 어떠한 조건이든 서로가 함께 풀어가라고 붙여 놓은 것이다. 

“내가 이런 여자와 살다 보니, 내가 이런 남자와 살다 보니” 그런 소리를 하면 벌써 잘못된 것이다. 

서로 이해하고 보듬으면서 서로를 다듬어 가려고 만난 것 같으면 그 일에 감사하고 나아가야 한다. 

‘내가 오죽 성질이 고약했으면 나를 사람 만드시고자 이런 사람을 붙여 놓았을까?’ 이렇게 해야 정석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시고자 일으키신 조건에 사탄이 장난을 쳐서 순서를 바꾸더라도 속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사탄이 장난을 쳐서 중간에 악조건을 넣었을 뿐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조건은 그대로 다 온다.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다.

순서가 바뀌었을 때 내가 감사치 못하면 내가 다가올 좋은 조건까지도 소멸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 

사탄이 끼어들어서 순서를 바꾸었을 뿐이지 내게 주어질 조건이 없어진 것이 아니다. 

조건을 없어지게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감사치 못하기에 조건이 소멸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조건은 항상 그대로 다 다가온다. 

다가오는 중간에 사탄이 장난을 쳐서 카드를 바꾸어 버려도 다음에 카드는 계속 돌아온다. 

 

힘들어도 우리의 얼굴에 기쁨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음에 좋은 조건을 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나쁜 조건이 주어져도 “아, 또 사탄이 장난을 쳐서 순서를 바꾸어 놓았구나” 하고 어차피 내게 좋은 조건이 다가올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된다.

 

악조건이 닥쳐도 결국은 다음에 좋은 조건이 닥칠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 사람이 감사를 잃나, 잃지 않나?’ 사탄이 장난을 쳤을 때 벌써 그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허덕거리면 결국은 다음에 닥쳐올 좋은 조건까지 빼앗기게 된다. 

이런 조건이 생기지 않게 사탄이 바라는 조건을 스스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지난날 다윗과 사울을 보라. 중간에 사탄이 장난을 쳐서 바꾸어 버렸을 때 사울이 ‘아차’하고 깨닫고 살려달라고 계속해서 엎드려 있었더라면 하나님께서 또다시 기회를 허락하셨을지 누가 알겠나? 

하지만 사울은 그 화풀이를 다윗에게 했다. 그로 인해 끝내 생명을 거두게 되었다.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기에게 올 좋은 조건까지 다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감사케 하기 위해 좋은 조건을 항상 예비하신다. 

단지 사탄이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중간에서 감사치 못하는 카드를 넣어서 헷갈리게 하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감사의 조건이 다가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내가 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자 사랑으로 예비하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께서 지으신 첫 사람 아담이 그 모습을 잃지 않았을 때는 “그의 입술로 뱉는 것마다 그 이름이 되었더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그 모습을 찾아가면 찾아간 만큼 우리에게 모든 만물과 모든 조건을 맡기신다. 

최대한 우리의 삶이 아담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이 사실을 마음에 꼭 새겨서 일생을 가누어가는 지표로 삼자.

 

(2000.03.05. 주일 / 김영호 목사)